추자도 서쪽 바다
저렇게 두꺼운 책을 펼칠 수 없는 것은
맨 처음의 기억과 너를 잊었기 때문
파도를 피하는 것만 맨발로 익혔을 뿐
자주 얼굴 바꾸는 바다는
딱딱한 겉표지가 없다
푸른 종이에는
어느 것 하나 움직이지 않는 사연이 없다
가끔 너의 무지개가 나타나 나를 놀라게도 하지만
과묵한 바위도 물풀 흔들며 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
책상 위로 배 한 척 길게 밑줄 그으며 지나간다
그 책을 마음대로 읽을 줄 아는 자는 오직 하늘뿐
작살의 비에 책장이 숭숭 뚫리기도 하지만
그 내용이 다시 책에 들어가
쏠배감펭의 노래나 눈이 순한 고래의
휘파람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다음 장으로 새롭게 넘어간다
이곳 이야기는 부력의 힘으로 둥둥 떠 누군가에게 흘러간다
하늘이 피곤한 눈동자를 감으면 책 속에는 또 별이 뜬다
너덜 해진 책에 어둠을 덧대고 한 번 더 단단히 묶어주는 별빛
바느질 자리마다 환하게 일렁인다
2012 시에 가을