자작시

만약에 젤리처럼

최인숙산호수 2017. 8. 24. 09:53

 

만약에 젤리처럼

 

 

 

 

 허물어지는 것에 기댈 때가 있죠 두 개의 짙은 눈썹만으로 공원에 걸린 시계는 11시 5분 배고프기에는 조금 이르고 잠들기까지는 조금 긴 시간 스케치북을 꺼내 의자 위에 펼쳐놓으면 다시 겨울이라 불러도 될까요 어떤 이름도 생각나지 않을 때 종이와 나 사이 깜깜해진 얼굴들이 지나다녀요 거품처럼 가볍고 하품처럼 간단히 지워질 수 있는 그런 표정들이 걸어 다녀요 바이러스 이름을 모르고 감기가 끝나는 것처럼 나는 봉지 속 약을 삼키고 열에 들떠 눕고 시계는 늘 같은 시간을 가리키며 훌쩍이는데 약봉지를 뒤져 하얀 알약을 가볍게 빼버리고 우리 미끄럼틀실루엣 위를 걸어볼까요 투명하고 길고 마디가 많은 벌레는 신맛이 나고 손톱만 한 곰은 질긴 발바닥을 갖고 있지요 가짜라고 말할 때마다 진짜보다 더 달콤해지는 것은 왜 그럴까요? 얼굴대신 사과라도 그려줄까요? 빈 스케치북 위를 거미가 지나가요 여덟 개의 다리가 흘러나와요

 

 

 

 

 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2017년 시산맥 가을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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